맨위로가기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45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는 공화국이었다. 1945년 세르비아 인민 공화국으로 시작하여, 1963년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74년 헌법 개정을 통해 보이보디나 사회주의 자치주와 코소보 사회주의 자치주에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사망 이후 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자치주의 권한이 축소되었다. 1990년 이후 세르비아 공화국으로 국명이 변경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해체된 후에는 세르비아 단독의 국가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유고슬라비아의 행정 구역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구성 공화국으로, 1945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국에서 시작하여 1963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군수 산업 중심지이자 다민족 사회의 공존을 추구했으나 1992년 독립을 선언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 유고슬라비아의 행정 구역 -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1963년 몬테네그로 인민 공화국에서 명칭이 변경되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는 공화국이었으며, 1991년 사회주의 명칭이 삭제되고, 1992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 합류했다.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 민주연방 유고슬라비아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해방을 위해 탄생한 민주연방 유고슬라비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임시 정부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6개의 연방 공화국과 2개의 자치주로 구성되었다가 페타르 2세 국왕 폐위 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해체되었다.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 반관료제 혁명
    반관료제 혁명은 1980년대 후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주도하여 세르비아 자치주인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의 자치권을 축소하고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한 일련의 사건이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의 권력 균형을 변화시키고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 세르비아의 역사 - 세르비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은 19세기 세르비아의 독립 운동으로 성립되어 발칸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해체되고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에 통합되었다.
  • 세르비아의 역사 -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1804년 시작되어 나폴레옹 전쟁과 1848년 혁명을 거치며 유럽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나,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 패배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전환되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 [전쟁]에 관한 문서
일반 정보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
국기 (1947–1992)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문장
문장 (1947–1992)
공식 명칭인민 공화국 세르비아 (1946–1963)
사회주의 공화국 세르비아 (1963–1990)
세르비아 공화국 (1990–1992)
약칭세르비아
지위유고슬라비아 구성국
공용어세르보크로아티아어
통용 언어세르보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변형)
헝가리어
알바니아어
수도베오그라드
1990년 유고슬라비아 내의 세르비아 위치
1990년 유고슬라비아 내의 세르비아 위치
정치
정치 체제1944–1948: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당제 사회주의 공화국
1948–1990: 티토주의 일당제 사회주의 공화국
1990–1992: 우세 정당제 의회 공화국
국가 원수시니샤 스탄코비치 (1944–1953, 초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1989–1990, 마지막)
정부 수반블라고예 네슈코비치 (1945–1948, 초대)
스탄코 라드밀로비치 (1989–1990, 마지막)
입법부국민 의회
역사
시대제2차 세계 대전
냉전
시작ASNOS (1944년 11월 9–12일)
사건제2차 세계 대전 종전 (1945년 5월 8일)
종료마지막 헌법 채택 (1990년 9월 28일)
이후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선포 (1992년 4월 27일)
이전 국가세르비아 군정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불가리아 왕국
계승 국가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세르비아 공화국
현재 국가세르비아
코소보
경제
인간 개발 지수 (HDI)0.719 (1991년)
HDI 변화감소

2. 역사

세르비아 연방국 지도 (1945년),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코소보 및 메토히야 자치 지역 포함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역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시작된다. 1945년부터 1963년까지는 '''세르비아 인민 공화국''', 1963년부터 1990년까지는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불렸다. 1974년, 보이보디나 사회주의 자치주코소보 사회주의 자치주세르비아에서 실질적으로 분리되어 다른 유고슬라비아 구성 공화국과 거의 같은 지위를 얻었다.[2]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대부분 연방 정부에 충실했지만,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 사망 이후 코소보에서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공산주의자 동맹에 균열이 생겼다.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장악하고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의 자치권을 박탈했다.

1989년,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대통령이 되어 코소보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파견을 요구했다. 다른 연방 공화국들의 반발과 당원 1인 1표 제도에 대한 반발은 민족 갈등을 심화시켜 1991년 유고슬라비아 붕괴로 이어졌다.

1990년, 국명은 '''세르비아 공화국'''으로 변경되었고, 1992년 몬테네그로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결성했다. 2006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면서 연방은 해체되었고 세르비아는 단독 국가가 되었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1941-1945)

1941년 4월 전쟁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붕괴된 후, 세르비아는 추축국에 의해 점령 및 분할되었다. 나치 독일은 세르비아 중앙 지역과 바나트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구역을 설정하여 직접 통제했으며, 베오그라드에는 꼭두각시 국민구제 정부를 설치했다. 메토히야와 코소보 남부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의해 점령되어 이탈리아 알바니아에 병합되었고, 바치카는 헝가리에, 시르미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세르비아 남동부는 불가리아에 점령되었다.

점령 초기 체트니크파르티잔이라는 두 저항 운동이 나타났다. 이들은 서로 다른 이념과 정치적 목표를 가졌는데, 세르비아 봉기 이후 체트니크는 파르티잔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추축국과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반면 파르티잔은 유고슬라비아를 연방으로 재편하고 세르비아를 그 구성 단위 중 하나로 만들고자 했다. 1941년 가을, 파르티잔은 해방된 지역에 세르비아 국민해방 주요 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임시 정부인 우지체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같은 해 12월 독일의 공세로 붕괴되었고, 이후 파르티잔 주력 부대는 보스니아로 이동했다.[1]

2. 1. 1. 추축군의 세르비아 점령

4월 전쟁 (1941년)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붕괴된 후, 나라 전체가 추축국에 의해 점령되고 분할되었다. 세르비아의 중앙 지역과 바나트 북부 지역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고, 베오그라드에 꼭두각시 국민구제 정부를 설치하여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구역을 직접 통제했다. 메토히야와 코소보 남부 지역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의해 점령되어 이탈리아 알바니아에 병합되었다. 바치카 지역은 헝가리에 의해 병합되었고, 시르미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세르비아 남동부는 불가리아에 의해 점령되었다.

점령 초기에는 체트니크파르티잔이라는 두 개의 저항 운동이 있었다. 이들은 상충하는 이념적, 정치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르비아 봉기 말에 체트니크는 파르티잔과 함께 초기에 시도했던 공동 저항 노력을 포기하고 대신 추축국과의 광범위한 협력으로 전환했다. 파르티잔은 유고슬라비아를 연방으로 변환할 것을 주장했으며, 세르비아는 그 연방 구성 단위 중 하나가 되었다. 1941년 가을, 파르티잔은 해방된 일부 지역에 최초의 임시 기관을 설립했으며, 이 기관은 세르비아 국민해방 주요 위원회가 이끌었다. 이 위원회는 우지체에 자리 잡았고, 이로 인해 이 운동은 ''우지체 공화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공세로 인해 같은 해 12월에 이 초기 국가는 붕괴되었다. 그 후, 파르티잔 주력 부대는 보스니아로 이동했다.[1]

2. 1. 2. 저항 운동: 체트니크와 파르티잔

4월 전쟁 (1941년)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붕괴된 후, 나라 전체가 추축국에 의해 점령되고 분할되었다. 점령 초기에는 체트니크파르티잔이라는 두 개의 저항 운동이 있었다. 이들은 이념과 정치적 목표가 달랐으며, 체트니크는 세르비아 봉기 이후 파르티잔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추축국과 협력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파르티잔은 유고슬라비아를 연방으로 재편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세르비아를 그 구성 단위 중 하나로 설정했다. 1941년 가을, 파르티잔은 해방 지역에 임시 정부인 우지체 공화국을 수립했고, 이 임시 정부는 세르비아 국민해방 주요 위원회가 이끌었다. 위원회는 우지체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독일의 공세로 인해 같은 해 12월에 우지체 공화국은 붕괴되었다. 그 후, 파르티잔 주력 부대는 보스니아로 이동했다.

2. 2. 세르비아 인민 공화국 (1945-1963)



1945년 세르비아 연방 국가의 국기


1946년 11월, 세르비아 헌법 의회 선거가 치러졌고,[3] 1947년 1월, 세르비아 헌법이 채택되어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 지위를 재확인하고, 보이보디나와 코소보 및 메토히야의 자치 지역 지위를 규정했다. 1953년에는 추가적인 사회 개혁을 도입하는 헌법이 채택되었다.

당시 세르비아의 정치 생활은 1945년 5월 집권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지부로 결성된 세르비아 공산당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군주주의 반대를 억압하기 위해 1945년 8월 유고슬라비아 인민 전선(PFY)을 설립했고, 다른 정당들은 곧 해산되어 정치 생활은 PFY 내로 제한되었다.[2]

2. 2. 1. 전후 재건과 유고슬라비아 연방 성립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군과 붉은 군대가 1944년 가을 세르비아를 해방시켰다. 베오그라드는 1944년 10월 20일에 해방되었고, 이후 새로운 행정부 창설이 시작되었다. 1944년 11월, 세르비아 민족 해방 반파시스트 의회가 소집되어 유고슬라비아를 세르비아를 포함한 연방으로 재구성하는 정책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민주 연방 유고슬라비아 내의 연방 국가로서 ''세르비아 연방 국가''()가 창설되었다.

1945년 4월, 이 과정은 공식화되어 임시 ''세르비아 인민 의회''가 창설되고, 초대 ''세르비아 인민 정부''가 임명되었다. 새롭게 창설된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코소보 및 메토히야 자치 지역은 세르비아로의 합병을 결정했다.[2] 1945년 11월 29일, 유고슬라비아는 공식적으로 연방 공화국으로 선포되었고, 1946년 1월 유고슬라비아 헌법이 채택된 후, 세르비아 연방 국가는 ''세르비아 인민 공화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3]

2. 3.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1963-1990)

1963년 유고슬라비아 헌법 개정에 따라 '세르비아 인민 공화국'에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 1974년에는 보이보디나 사회주의 자치주코소보 사회주의 자치주세르비아로부터 실질적으로 분리되어 다른 유고슬라비아 구성 공화국과 거의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 사망 이후,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양측의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공산주의자 동맹에 균열이 생겼다.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력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장악하고 코소보 및 보이보디나의 자치권을 박탈하여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1989년,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에 코소보 파병을 요구했고, 다른 연방 공화국들의 반발과 당원 1인 1표 제도에 대한 반발은 유고슬라비아 내 민족 갈등을 심화시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붕괴와 1991년 유고슬라비아 붕괴로 이어졌다.

2. 3. 1. 1963년 헌법과 사회주의 체제 강화

1963년,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헌법이 채택되면서 연방 국가의 이름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연방 구성 단위는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명칭이 도입되었다.(Социјалистичка Република Србија|소치얄리스티치카 레푸블리카 스르비야sh)[2]

2. 3. 2. 정치적 숙청과 권위주의 강화

1966년, 유고슬라비아 부통령(1963-1966)이자 정보기관 OZNA의 창설자인 알렉산다르 란코비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을 감시했다는 혐의로 직위에서 해임되었다.[2]

알렉산다르 란코비치


1971년 크로아티아의 봄 이후, 라틴카 페로비치와 마르코 니케지치를 포함한 세르비아 공산당 지도부 거의 전체가 "자유주의자"라는 혐의로 숙청되었다.

2. 3. 3. 1974년 헌법과 자치주의 확대

1974년,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어 보이보디나코소보 자치주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이들은 '사실상' 공화국과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2] 처음으로 대통령 제도가 형성되어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이 설치되었다. 의회는 대통령직 구성원 15명과 대통령 1명을 선출하여 4년 임기, 이후 2년 임기로 활동하게 했다. 새로운 헌법은 세르비아가 자치주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제한했다.[2]

2. 3. 4. 티토 사후 민족주의 갈등 심화 (1980년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1980년에 사망한 후,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간의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2] 1981년, 코소보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공화국 지위를 요구했다.[2] 같은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경제 위기를 겪었고,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국가 지도자들은 어떠한 개혁도 수행할 수 없었다.[2]

2. 3. 5.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등장과 권력 장악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한 후,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 및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일어났다. 1981년 코소보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공화국 지위를 요구했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경제 위기를 겪었다.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국가 지도자들은 어떠한 개혁도 수행할 수 없었다.[2]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공산주의자 연맹 의장은 1987년 4월 코소보를 방문하여 코소보 세르비아인을 보호하기 위한 신속한 조치를 약속했다. 파라친 학살로 알려진 사건에서 코소보 알바니아계 군인이 동료 군인에게 총격을 가하면서 코소보의 민족 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 이반 스탐볼리치는 신속한 해결책보다는 타협을 원해 밀로셰비치와 충돌했다. 이 갈등은 제8차 회의에서 스탐볼리치가 페타르 그라차닌으로 세르비아 대통령에 교체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2. 4. 헌법 개정과 유고슬라비아 해체 (1988-1992)

1988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에 대한 새로운 수정안이 채택되어 민주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이 기회를 틈타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강화했다. 1988년과 1989년 동안, 보이보디나, 코소보, 몬테네그로에서 "반관료주의 혁명"으로 알려진 일련의 쿠데타가 성공적으로 일어나 이 지역의 자치 지도부를 교체했는데, 이 쿠데타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주도했다.[1]

이러한 움직임은 서부 유고슬라비아 공화국(특히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의 공산주의 정부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이들은 반란이 자국 영토로 확대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밀로셰비치에 반대했다. 점증하는 적대감은 결국 1990년 집권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의 해체로 이어졌고,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로 이어졌다.[1]

슬로베니아 당국이 밀로셰비치의 정치를 지지하는 세르비아인 그룹의 류블랴나 집회를 금지한 후, 밀로셰비치는 1989년 말 슬로베니아와 무역 전쟁을 시작했다. 이 세르비아-슬로베니아 갈등은 1990년 1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 제14차 회의에서 절정에 달했고, 슬로베니아 대표에 이어 크로아티아 대표가 회의를 떠났다.[1]

2. 4. 1. 자치주 권한 축소와 세르비아 민족주의 강화

1989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국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1] 그는 연방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코소보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파견하여 분리주의를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1] 이와 동시에 세르비아는 세르비아인에게 다수의 투표권을 부여하는 '1인 1표' 제도를 지지하며 연방 선거 시스템의 여러 개혁을 제안했다.[1]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민족 갈등이 고조되었고, 집권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이 붕괴되었으며, 연방 기관의 위기가 뒤따랐다.[1] 이러한 사건 이후, 1989년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의회는 보이보디나코소보 자치주의 자치권을 대폭 축소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1]

2. 4. 2.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해체와 연방 붕괴

1988년, 유고슬라비아 헌법 수정으로 민주화가 시작되었지만,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주도한 "반관료주의 혁명"으로 보이보디나, 코소보, 몬테네그로의 자치 정부가 교체되었다. 이는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의 반발을 샀고, 1990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 해체와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로 이어졌다.[1]

1989년 세르비아 국가 주석이 된 밀로셰비치는 코소보 문제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파견을 요구했고, "1인 1표" 제도를 주장하며 연방 선거 시스템 개혁을 제안했다. 민족 갈등이 심화되고 연방 기관의 위기가 닥친 후, 1989년 세르비아는 보이보디나와 코소보의 자치권을 축소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1]

1989년 말, 밀로셰비치는 슬로베니아와의 무역 전쟁을 시작했고, 1990년 1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 제14차 회의에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대표단이 퇴장하면서 연맹은 사실상 붕괴되었다.[1]

1990년 이후, 국가는 ''세르비아 공화국''(Република Србија|Republika Srbijash)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1992년 몬테네그로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결성했다.[1]

3. 행정 구역



SR 세르비아의 행정 구역 (1974–1990)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는 보이보디나 사회주의 자치주코소보 사회주의 자치주 두 개의 자치주가 있었다. 두 자치주 밖에 위치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중앙부는 일반적으로 "본 세르비아" (''"Uža Srbija"'')로 알려졌다.

4. 인구

세르비아의 민족 분포 (1981년)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인구는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세르비아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1971년 인구 조사에서는 8,446,591명, 1981년 인구 조사에서는 9,313,677명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다.[1] 두 인구 조사 모두 세르비아인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으며, 알바니아인, 헝가리인, 크로아티아인, 무슬림, 유고슬라비아인 등이 그 뒤를 이었다.

4. 1. 1971년 인구 조사

민족인구비율(%)
세르비아인6,142,070명72.7%
알바니아인984,761명11.66%
헝가리인430,314명5.10%
크로아티아인184,913명2.19%
무슬림154,330명1.83%
유고슬라비아인123,824명1.47%
슬로바키아인76,733명0.82%
루마니아인57,419명0.62%
불가리아인53,800명0.58%
로마니49,894명0.54%
마케도니아인42,675명0.46%
루신인20,608명0.22%
튀르크인18,220명0.20%
슬로베니아인15,957명0.17%
블라흐인14,724명0.16%
총계8,446,590명100%


4. 2. 1981년 인구 조사

1981년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인구 조사 결과[1]
민족인구비율(%)
세르비아인6,331,52767.96
알바니아인1,303,03213.99
유고슬라비아인441,9414.75
헝가리인390,4684.19
무슬림215,1662.31
크로아티아인149,3681.60
로마니110,9561.19
마케도니아인48,9860.53
슬로베니아인12,0060.13
총계9,313,677100.00


5. 정치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치 체제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SKJ)의 일당 지배 하에 있었다. 이 동맹은 세르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SKS), 보이보디나 공산주의자 동맹 (SKV), 코소보 공산주의자 동맹 (SKK)의 세 분파로 나뉘어 있었다.[1] 1980년대 후반까지 세르비아 분파는 연방 정당에 비교적 안정적이고 충성스러웠으나,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분열되었다.[1]

이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자율성이 축소되고, 그의 측근들이 요직에 임명되었다.

5. 1. 공산당 일당 독재와 권위주의 통치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당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하부 조직인 세르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이었다. 1980년대 후반,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간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고 알바니아인의 항의가 활발해지면서, 이 문제에 대한 대처를 둘러싸고 당내 분열이 발생하기 전까지 세르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은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며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에 충실했다.[1]

코소보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이반 스탐볼리치 대통령을 지지하는 전통적인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보다 급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의 세력은 코소보의 세르비아인 보호를 주장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지지했다.

5. 1. 1.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권위주의 통치와 민족주의 정책

밀로셰비치는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코소보 세르비아인들이 알바니아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코소보의 세르비아인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주장은 대중의 지지를 얻었고, 이른바 반관료주의 혁명을 통해 보이보디나, 코소보,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산주의 지도부를 전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세르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은 밀로셰비치를 지도자로 선출했다.[1]

밀로셰비치는 코소보에서 알바니아 민족주의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긴급 권한을 부여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또한,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자율성을 축소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임명했다.[1]

1990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회의에서 밀로셰비치와 그의 추종 세력은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개혁안에 반대하며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은 실패했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서 탈퇴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붕괴로 이어졌고, 결국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Устав Републике Србије (1990) — Викизворник, слободна библиотека https://sr.wikisourc[...] 2023-07-20
[2] 웹사이트 PETAR ATANACKOVIĆ: Srbija iz tri dela... mora biti cela https://web.archive.[...] 2022-01-10
[3] 웹사이트 National Assembly of the Republic of Serbia: After Second World War http://www.parlament[...]
[4] 웹사이트 UPHEAVAL IN THE EAST: Yugoslavia; A Sign of Bad Times in Yugoslavia: Trade War Between Two Republics https://www.nytimes.[...] 1990-01-2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